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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말씀집회 3. 예수님의 복된 소식

  • 안병호목사

십자가와 부활은 온 인류에게 증거 되어야할 기쁜 소식이다.


본문 :마가복음 16:9-20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본문은 “교회가 계속 부활절을  교회의 역사와 믿음,  선교 적 선포와 섬김의 중심점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9-11 절은  요20:11-18을 ,  12-13절은  누가복음  24:13-32을 ,  14절은 눅24:36-43,  19절은 눅24:50-52절을 상기시킨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지상명령의 형태다(15-18). 이 부분은 종종 마태복음 28:18-20절과 비교 된다. 15절은 독특한 마가 식 문체이다. 실로 15절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한 확실한 요약이라고 주장해도 마땅하다. 그런 이우로 해서 이 구절들은 연구하고 해설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 복된 소식은 예수님이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복음(euangelion)을 마태는 네 번만 사용했는데 반해, 마가는 일곱 번 썼다(1:1,14,15, 8:35, 10:29, 13:10, 14:9). 16;15을 추가 한다면, 총 여덟 번이 나오는 셈이다. 마가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복된 소식’이었다. 수신자로 여겨지는 로마 교회에 복된 소식이었다. 이는 로마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에도 복된 소식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말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이 ‘복음’이라는 단어는 풍부한 연상을 지니고 있다. 예를 구약에서는 그 말과 어원이 같은 동사가 이사야서 후반 장들에서 종종 나오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포로생활에서 약속의 당으로 귀환 시키시는 장면에서 그 말이 사용된다.


52:7 좋은 소식(good news)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복음(euangelion)에 대한 이러한 구약의 연상들은 마가의 메시지가 지닌 취지를 일부 드러내는데 즉각적인 도움을 준다.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이 다시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 예수 안에서 그분은 포로 된 자를 풀어 주러 오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이 바벨론이 아니라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의 세력들이다.

 그러나 마가는 복음서를 쓸 때 단순히 구약을 배경으로 쓴 것만은 아니다. 또한 마가는 자기가 살고 있던 당시를 염두에 두었음이 엿보인다.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생일(9월23일)을 기쁜 소식의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 하여 역년의 시작으로 표시하고 있다. 아우그스투스는 황금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존재로 보인다. 너무나 위대한 황금 시대여서 “시간으로 인간 삶의 과정을 계산할 때 그의 탄생을 기점으로”할 정도다.


  마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복음의 시작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다. 더 나아가, 그 복된 소식은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 시대, 성령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셨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시작하셨다.” 즉 복된 소식을 선포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역사의 과정이 바뀌었다고 선포한다. 그 때문에 모든 역사는 주전과 주후로 계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개인의 구세주 이상인 분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주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쁜 소식은 자식이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성공하고 결혼 잘하고 아기 잘나는 것일 것이다. 자기가 산 집값이 오르고, 주식이 오른다면 그것 역시 기쁜 소식일 것이다. 인기 얻고 명예 얻는 것이 기쁜 소식일 것이다. 그래서 성형 수술을 하고, 국회의원 되고 대통령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신용이고 인격이고 다 팽개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기쁜 소식일까요? 이것을 갖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자살 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우리는 이것이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요, 예수가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도 참된 복이 무엇이었는가? 처음에 그에게 있어서 복은 아들과 부를 얻는 것이었을 얻는 것이었을 것이다.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고, 낯선 땅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 그의 소원이 무엇이었을 것인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얻는 것으로 복을 얻지 못했다. 그가 진정 복을 발견 한 것은 이삭을 바치면서 깨닫게 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알므로 진정한 복을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 만민에게 전파 될 복은 그가 경험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바라며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Ⅱ. 예수님의 복된 소식은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예수님의 사명은 범세계적이시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13:10).  우리는 교회란 ‘선교적 회중’임을 새로이 깨닫고 있다. 어떤 교회도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은 모둔 문화, 모든 인종, 모든 세대, 모든 사회 집단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살아나셨다.

처치 아미의 조지 링스는 교회는 “번식 하도록 명령 받은 공동체”라고 교회를 정의 내렸다.



  “너희는 ....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15)고 명하신다. ‘전파하다’라는 동사도 마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다. 12번 나온다(16:15,20까지 하면 14번). 그에 비해 마태, 누가복음에는 9번 나온다.

마가는 이 용어를 교훈적인 용도로 사용한다. 첫째,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1:14). 마가는 예수님이 많은 치유사역을 하셨지만 전파 사역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 그렇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체적 필요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셨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에 관심을 가지셨다. 더 나아가 마가복음에서 전파하는 일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도움을 받은 자들은 ‘복된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나병환자, 귀먹고 어눌한 자).


 지금도 복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전파는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룹토론이 설교를 보완해 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설교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전파는 다른 형식들을 취한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소식’이지 ‘견해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일방통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떻게든 우리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들을 찾아내야 하며 권위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누가 복음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긴다(45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44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신다(44-45절).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철저히 성경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만민에게 전파 되어야할 것을 가르치신다.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제자를 삼으라.’(마28:19)기보다는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지시를 받는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성에 유하라” 이 능력은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오순절에 보내 주신 성령의 능력이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은 믿고 고백하는 교리가 아니라 체험하는 능력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증인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증인이라” 증거 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증인은 첫째, 삶으로 보여 주는 증거가 중요하지만 누가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언제나 말로 나타난다.

둘째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임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그러면서 복음이 제시하는 죄 사함과 복음이 요구하는 회개를 명확히 말해 주는 것이다. 창조, 고난, 성경의 영감등 하지만 주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한다.



셋째로 친구들과 이웃-‘예루살렘’ ‘모든 족속’에게 증거 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메시지였다. 작년 선교 한국에 와서 주제 강의를 한 밥 쇼그린은 창세기 12:1-3을 근거로 성경은 한권의 책인데 그 주제는 첫째는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 하시기를  원하신다. 둘째는 복의 근원이 되라, 곧 너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증거 하는 일이 결코 쉬웠던 적은 없다. ‘순교자’라는 말이 헬라어의 ‘증인’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나누고자 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우리 혼자 힘으로 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성령을 약속하셨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초대교회가 확장된 비결은 어느 사도가 가진 은사들에 있지 않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께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Ⅲ. 증인으로서의 준비가 필요하다(사도행전 1:12-2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또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을 명하셨다. 제자들은 이 명령을 그대로 순종했다. 본문에서 우리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증인으로서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증인으로서의 준비의 과정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서 항상 증인으로서의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하겠다.


1.  전도의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12절을 보자.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갈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루살렘은 원수들에 의해서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다. 그 원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어떤 해를 끼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실로 무서운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이 전도해야할 일차적인 전도의 현장이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그들이 에루살렘에 돌아 왔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내 놓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때로 우리가 전도의 현장에 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속해 있는 직장에서 예수님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쑥스럽다. 특히 그 동안에는 전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얼마나 쑥스럽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곳이 나의 전도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한다. 어떠한 위험도 극복해야한다. 우리 마음 가운데 감람산에서 숨어 있던 방에서 뛰쳐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 용기야말로 증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준비의 자세다.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곳이 나의 전도의 대상이다 하는 자세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위험이요 어려운 결단이다. 요한 웨슬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침으로서 그의 선교의 역사는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우리도 한번 외처 보자. 왕십리는 나의 교구다. 사근 초등학교는 나의 교구다. 로고스는 나의 교수다. 김 & 장은 나의 교구다.

2. 기도가 필요하다.


  13,14절을 봅시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가?


첫째는 11한 사도의 이름이 나온다. 사도들의 이름이 나오는 순서가 책에 따라 다르나 공통점은 항상 세 그룹으로 나오고 그 그룹의 첫 사람은 항상 같다. 베드로를 중심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을 중심한 도마 바돌로오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다가 빠지고 11명의 제자가 모였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재물도 직업도 가족까지도 버린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여인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나온다. 여기 나온 여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아주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을 섬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눅 8:1-3), 십자가 밑에 까지 따라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 19:25),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눅 24:10)등이다. 이들이 얼마나 주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기쁨으로 순종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일생을 칼이 그 마음을 에이는 것 같은 희생과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여기 나온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예수님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믿음이 많이 성장한 것 같다.


  이 사람들은 한 결같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각오가 서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이 전도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각자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고 120명이나 된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헌신된 일군 120명이 온전히 합심하여 기도한다면 이 힘은 무시할 수 없이 강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이와 같이 기도한 목적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함이다. 성령이 교회를 능력 있게 하고 올바로 인도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기도이다. 교회가 합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배워야할 것이 있다. 첫째는 그들이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성령이 임해야 복음을 증명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 합심했고 전심전력했다. 우리가 영적인 각성을 위하여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겠다.

둘째 그들은 기도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적인 기도를 했다. 여기서 계속이란 다른 아무것도 아니하고 10일 동안 함께 머물러 자고 먹고 하면서 기도했다는 뜻은 아니다. 연속적으로 기도했다는 뜻이다.

 셋째,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합심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고 말씀 하셨다. 


3. 그릇을 준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12명의 사도가 무엇보다도 합심해야 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없어짐으로 그릇이 깨어지고 만 것이다 . 유다의 문제는 교회의 공동체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도들 가운데는 자기들도 장차 유다와 같은 죄에 빠지지 아니할 가. 두려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로는 강력한 사단의 세력을 대응하여 선교의 사명을 감당키 어렵다. 그래서 기도하던 중 베드로가 처음으로 일어나서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다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지만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력이 형성되었고 교회의 강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제자들은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는 모습을 보게 된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의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릇을 만들어야한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하우스를 이루고자 할 때 우리 헌신 자들이 배워야 할 내용이다.


Ⅳ. 복음 전도에는  중요한 세 가지요소가 필요하다(행 2:37~42)

복음 전도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 증인(Witness), 증언(Testimony), 증거(Evidence) 이세 가지가 있어야 된다.

1.복음에 증인이 있어야 한다.

그 증인은 바로 베드로 이었다. 증인이 중요하다. witness. 사람들이 메시지를 듣기 전에 먼저 그 증인을 신뢰할 수 있는지 그 증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 사람의 인격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증인은 증인으로서의 이 credibility가 대단히 중요하다.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두 가지를 느껴야 된다.  하나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평소에 정직한 사람이 전도 잘 한다. 왜 그 사람의 말을 일단 사람들이 신뢰하고 들어간다.  그 다음에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지금 자기를 위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정말 나를 위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야 한다. 마치 그 세일즈맨이 물건을 팔 때 물건을 팔기 위해서 세일즈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물건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이 물건을 사는 사람은 참 행복하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하는 것을 진심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전달하면 듣는 사람이 구매 심을 갖게 돼는 것과 같다. 그런데, 단지 물건을 팔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 이렇게 보이면 마음을 닫는다. 정말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 진정성이 전달이 될 때, 그 증인의 가치는 높아지는 것이고, 효과는 더 올라가게 된다. 오늘 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다 그랬다. 마음이 찔렸다.

  이 37절에 보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 이 말은 베드로의 증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말이다. 일단 베드로의 말을 내용을 듣기 전에, 그 내용과 상관없이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 베드로의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다 하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증인이 복음전도에 있어서 첫 번째 요구 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좋은 증인의 말을 사람들은 듣는다. 


2. 복음 전도에는 증언이 있어야 한다.

 증언(testimony)이 중요하다. 증인이 아무리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증인의 증언이 부실하면 그 다음에 신뢰감이 떨어진다.  증인은 결국 증언에 의해서 그 가치가 결정되게 된다. 오늘 이 사람들이 베드로의 증인으로서의 그 진정성을 인정해주고 그 마음에 찔림을 받았는데 사실 그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38절에 나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라. 죄 사함 받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다. 복음 전도의 본질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듣지 못한 것을 듣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 할 수 있는 권세가 없다. 부모도 자식에게 죄 사함 받으라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스승도 학생에게 죄 사함 받으라고 말 할 수가 없다. 근데 베드로는 지금 죄 사함을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당당함이라는 것이 바로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당당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깔보는 당당함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해서 또 정말 자기 자신이 본인이 마음속에 가진 것을 진심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그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았기 때문에 인정해줬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았고 그들이 인정해 줬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확신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는 당당함이 있잖은가. 정직하면 항상 당당함이 있다.


세일즈맨이 정말 좋은 물건을 팔 때는 어떤 태도로 파는가. 부끄럽지 않다. 자기 물건에 대해서. 살 테면 사고 말테면 마라. 못 사는 사람이 바보다. 안사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다 이런 당당함을 가지고 물건을 판다. 그러면 소비자 입장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그냥 물건이나 팔아먹으려고 저런 것이 아니라 정말 믿고 있구나. 자기의 testimony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그거를 느낀다. 그 증인에 대해서 credibility를 인정해 준 것 뿐만 아니라 그 증인의 그 말속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 준 것 뿐만 아니라 그 testimony자체가 권세가 있다.

3. 그 다음에는 세 번째로 증거가 있어야 한다. evidence.

증인을 신뢰했다. 증인의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증인의 그 testimony도 아주 좋았다. 그 증인의 testimony에 아주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라 세례 받아라. 죄 사함을 받으라. 오케이. 그래서 예수 믿겠다. 근데 예수 믿으니까 좋은 게 뭐냐. 예수 믿으면 좋은 게 뭐냐. 사람들은 그 증거를 알고 싶어 한다. 다 좋은데 so what? 예수 믿어 가지고 달라진 게 뭐고 예수 믿으면 도대체 내가 받는 게 뭐냐 이거다. 중요한 얘기다. 예수 안 믿었을 때하고 지금 믿었을 때 하고 달라진 게 뭔지 분명히 그 evidence가 있어야 된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분명히 얘기 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랬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예수 믿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무엇이냐. 성령이다. 이 evidence가 성령의 evidence가 가장 힘 있는 evidence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 성령의 evidence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evidence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역시 예수 믿고 나서 뭐가 달라졌는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게 뭔지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지금 영생 천국 구원 받는 거 그거 말고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게 뭐냐. 그 것을 성령으로 얘기했다. 여러분 여기 보니까 사람들이 이 성령 받은 사람들을 술에 취했다 그랬죠. 2장 13절에 보니까 저들이 술에 취했다. 술 취한 사람들은 분명히 나타난다. 술 취한 게. 술 취하기 전과 맨 정신과, 술 마신 다음에 취했을 때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성령에 비유한 것이다. 결국 예수 믿고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그 증거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고, 절제할 수 없는 것들을 절제하고,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게 되고, 끊을 수 없는 것들을 끊게 되고, 성령께서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런 변화의 증거. 이 증거가 증인과 증언과 함께 따라온다면 쐐기를 박는, 그 복음 전도에 확실한 쐐기를 박는 그러한 힘으로 작용을 한다.
성령 받은 사람으로서의 증거가 뭐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거. 아버지를 부를 수 없는 분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는 것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 있다. 뭐 앞에 나와서 하는 공 기도는 고사하고 밥 먹을 때 하는 기도도 정말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 기도는 그냥 하는 게 아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가 끊지 못했던 나쁜 습관들 끊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께서 다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옛날의 죄의 종노릇하면서, 죄에 붙잡혀 가지고 죄의 도구로서 사용되어진 내 몸이 이제 성령의 도구로 의로운 일을 하고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어지는 다 이게 증거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게 여러분에게 뭐에요. 가족. 내 자식. 부모. 형제. 사랑. 마음의 평화. 진정한 만족. 이런 것들이 사실 내적인 것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여러분 성령의 열매를 보세요. 돈 주고 못 사는 것들이다. 그리고 도저히 성령 없는 세상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들이. 그러니까 성령보다 더한 증거는 없다.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또 복음 전할 수 있는 담대한 용기도 주시고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나는 도저히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없는데 성령이 나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은사도 주시고 도저히 목자로서 내가 일 할 수 없는데 그런 건 정말 난 재주 없는데 성령께서 도와 주셔서 하다 보니까. 이상하게 도저히 열매가 없을 거 같은 그 사람에게서 열매가 나타나고 오히려 잘 할 것 같은 사람은 못 하는 경우도 있고 이상하단 말이다. 다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이 베드로가 여러분 성령 받아 가지고 지금 이러고 있잖은가. 이 어부가 뭘 배웠다고. 3000명씩이나 하루에 전도를 하는가. 이 베드로에게는 지금 성령보다 더 큰 증거가 없다.

우리가 힘 있게 더 확신 가지고 더 진실하게 복음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새길 바란다. 그게 베드로의 설교였다. 증인과 증언과 증거가 삼위일체로 함께 역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다시 교회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통해서 어떤 기대와 어떤 만족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어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소원과 그 기대와 그 만족과 여러분들이 교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전도와 선교로 열매가 나타나야 된다.


Ⅴ. 복음 전도의 모델이 필요하다(행 19:8-41)

1. 설득의 능력


 바울은 일  년 전에 가르쳤던 회당에 돌아와 다시사역을 시작한다(18:19-21).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로 묘사된다(8; 행 8:12;20:25) 오늘날 오래된 기독교 교파에 속한 어떤 집단에서는 기독교 선교를 사회 내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퍼트리는 것으로 축소해 버리고 그 나라를 열고 구현하신 왕 예수님에 대해 공개 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의 유일한 소명은 인도 국가의 세속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특성을 뒷받침하고 육성할 “가치들의 저수지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한 믿음에 대해 도전하지 않고 어떻게 “정의”와 “연합”과 같은 가치들을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적  가치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하는 역사 이야기에 전제된 사물에 대한 시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다른 시각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야기에서 캐낸 가치들에 공헌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런 가치들을 만들어 낸 이야기를 선포하지 말라고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세상을 위하여 교회에 맡겨진 가장 중요한 것을 부인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는 “담대히 …….강론하며 권면했다”(8). 바울이 “아침 열한시부터 오후 네 시 까지 ” 강론했다는 사실이 덧붙여져 있다(NRSV각주).

  유대인 회당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리고 두란노의 세속적인 극장에서 바울은 논증과 설득을 겸했다. 이러한 단어들은 바울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한 사역을 누가가 소개할 때 다시 나타난다(행 18:4,13; 19:8,9,26).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 어휘는 바울의 복음 제시가 진지했으며, 사리에 잘 맞으며, 설득력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청중과 지적인 대화 나누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믿거나 말거나“하는 식으로 전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논증을 다듬고 정돈했다. 그는 회심시키기 위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며, 실제로 누가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설득 당했다.’”

 많은 기독교 집단에서 기피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종종 그것이 편협하고 합리주의적인 계획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템플 가드너(Temple Gardner, 1873-1928)는 31년 동안 카이로에서 사역한 영국국교회

선교사였다. 변증문서는 동료 인간을 위해 부드럽게 써야만 한다. 단순히 논쟁자들을 패배시킬 목적으로 써서는 안 된다. 게다가 가드너가 볼 때, 이야기, 역사, 드라마, 음악, 시, 그림 등 그리스도의 영의 흔적을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전인에 대한 기독교 변증의 합당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 가드너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 할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하다,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어조의 논쟁이 아니라 즐거움이 넘치는 증거와 부드러운 초청이 담긴 노래가 필요하다.”


 또 다른 무슬림 선교사 케네스 크랙 역시 이와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면, 그분은 공포되어야만 한다. 이슬람이 지금 이슬람 그대로라면, 그리스도는 반드시 공포되어야만 한다. 오해가 있는 곳마다, 증거가 스며들어야만 한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흐릿해지는 곳마다, 그 베일이 벗겨져야만 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놓치는 곳마다, 그들에게 그분이 다시 소개되어야만 한다…….이슬람이 존재하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누가는 또한 바울이 2년 동안 에베소 ‘학교’를 운영했으며, 이 사역의 결과 로마의 아시아 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복음화 되었다고 기록한다(10절). 첫째, 장날 혹은 수많은 종교 제전에 참석하기 위해 에베소에 몰려온 시골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이 이상한 새로운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러 잠시 방문했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농장과 고향에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둘째, 바울은 동역 자들을 훈련시켜서 때때로 리쿠스 계곡에 있는 인근 읍들에 파송했을 것이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들이 바울 사도가 아니라 바울과 함께 여행한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을 안다. 에베소는 바울의 작전 기지였다. 두란노 서원의 2년에다가 회당에서의 3개월을 더하고 거기에다가(22절의) “얼마 동안”을 추가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20:31에서 말하는 “삼년”이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을 말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2. 기적과 능력


  바울의 설득력 있는 설교와 더불어 놀라운 치유와 축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겨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절).누가의 설명은 세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 한다.


첫째, 바울 자신은 그의 사역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수반된 것을 언급하지만(고후12:12; 롬15:18; 참고 갈 3:5; 히 2:4), 누가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이 전형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사도 적 기적도 아니었다. 여기서만 일어난 특이한 기적이란 것을 말하기 위하여 “튀쿠사스”(특이한, 비상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다. 바울의 능력의 비범한 특성은 그의 몸에 닿은 옷 조각을 아픈 사람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 누가는 바울이 병을 고치는 치유의 손수건과 그것과 유사한 것을 팔거나 그와 같은 비결을 전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전도 관에서 신비의 약처럼 파는 생수 같은 것을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손수건’으로 번역된 단어는 관례상 육체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땀 닦는 천 조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그들은 이 천 조각들이 효험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마도 더 많은 천 조각을 가지러 왔을 것이다.


셋째, 이것이 ‘마나’(mana)즉 영묘한 힘-치유자의 옷 한 조각(또는 그림자까지)을 매개로 치유력을 전달하는 것 - 에 대해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이교 신앙을 지지하는 본문 같지만, 누가는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무지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적응(accommodation)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수님이 혈류증을 앓는 여인의 작은 믿음에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눅 8:43이하) 에베소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로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알리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마법 기술로 이용하려 한 에베소의 유대인 축사 자들은 재난을 당한다. 에베소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17). 이것은 집단 회심으로 볼 것은 아니고, 새롭고 강력한 신을 접하여 자기를 보호하는 행위와, 선교사들과 그들의 메시지에 대해 일반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방금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렸다”(18). 마술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르는 일이 이어졌는데(19), 아마도 당사자들은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이야기에서 기독교 신앙은 로마 제국의 '대중 종교‘, 즉 마술과 비법, 점성술과 운명론이라는 종교의 대안으로 소개된다. 벤 위더링톤 3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독교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람의 목적을 위해 조종할 수 없는 종교, 장난치듯 대하다가는 혼나고 마는 종교로 묘사되고 있다. 다시 말해, 마술과 같은 대중적 만병통치약과 로마 황제와 같은 ‘공인 된’ 구세주와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인간과 세상의 변혁과 구속의 진정한 근원으로 묘사되고 있다. 기독교가 참되고 기독교 신앙이 진실로 삶을 변화시킨다면, 로마 황제는 더 이상 신의 옷을 입지 못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을 한 자들에게서 이교적 사고방식을 제거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타문화 선교는 단순한 전략적 계획이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요인과 인간적인 요인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선교 연구와 교회사 책들을 보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적시에 개입하신 사례들이 자주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토착 부족민들 회심한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정령 숭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에 ‘마음을 여는데’ 꿈, 환상, 이적, 축사와 기적적 치유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진실로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교사 엘리야라고 불리는 데이비스 목사의 예를 보자. 1840년대 후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 투어 사용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들어  땅이 바싹 마르고 양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기근이 들 것을 염려한 족장은 마술로 비를 오게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청했다. 그들이 실패하자, 그들은 그 지역 선교사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가족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알아차린 데이비스는 신속하게 행동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다. 말을 타고 족장의 마을로 달려간 그는 “다음 주일 예배에 오십시오, 우리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참된 종들과 여러분의 가장 좋은 친구들이 누구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와 신자들은 다음날 금식하며 기도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일요일, 족장과 그의 종자들이 교회에 들어섰다. 데이비스와 회중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아연으로 만든 예배당 지붕위에 커다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강물이 거의 넘쳐날 정도로 전 지역이 물로 흠뻑 적셔졌으며, 족장과 그의 어머니는 그 날 밤 강을 건너갈 수 없어서 다음날까지 선교 기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복음에 대한 반감이 이 능력 대결 앞에서 녹아내렸다.


 오늘날에 있어서 능력 있는 복음 사역은 무엇인가? 아이들을 능력 있는 아이들로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유초등부 교육이 너무나 중요하다. 영어 공부, 영어 캠프, 영어 주부 교실 이와 같은 것은 복음 전도에 너무나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건강을 탁구 교실도 아주 중요하다. 오늘날 진정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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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말씀집회 3. 예수님의 복된 소식
  • 2007-04-08
  • 안병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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