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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말씀집회 1. 예수님의 십자가

  • 안병호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기쁜 소식이다.


본문 : 막 10:35-45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갈 6:14).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은 언제나 십자가였다. 베드로의 메시지의 핵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십자가는 창세기 3:15절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에 울려 퍼진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가죽을 옷을 지어 입힘으로 짐승의 피를 흘려서 아담의 수치를 감추어 주셨다. 아벨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십자가를 암시해 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 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어린양의 피는 가장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시해 준다. 레위기는 제사 제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기를 여러 가지로 암시해 주셨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을 원망라다가 독뱀에 물린 백성들이 모세가 만들어 세운 구리 뱀을 바라봄으로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은 이것을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 시켰다(요 3:14). 신명기에서는 백성의 조l 때문에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예수님의 아픔에 동참했는지 모른다. 시편은 구석구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계시해 주고 있다. 특히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선지 서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 곳에 울려 퍼진다. 특히 이사야 52,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으로 보듯이 그려주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거의 반 이상을 십자가의 사건으로 다룬다.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죽기 전의 12시간의 사건을 기록하는데 반 이상을 할애 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전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서신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으 주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시록은 어린양의 희생을 찬양하는 글들로 가득 차있다. 이처럼 십자가는 성경의 핵심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가 이 짧은 시간에 그 깊고 넓은 십자가를 다 이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그 만분의 일만이라도 그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가 될 것이다.


Ⅰ.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


1. 독생자를 주신 사랑

크레디아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을 설명하면서  “나는 그것이 대리 제물의 예표(수양-그리스도), 대리 제물이라는 유구하게 내려오는 주제(수양, 유월절 양, 성전제사, 그리스도),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시는 것에 대한 신약의 언급들(요 3:16, 롬 8:32)이 혼합 된 것이라고 본다.


 아버지가 얼마나 기꺼이 자기 아들을 속죄재로 드리러 가는 가를  주목할 수 있다.  요3:16의 장엄한 말과 연결 된다. 물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에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아도 됐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바울은 롬 8:32에서 아브라함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생각을 반영 하는 듯하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주시는 더 큰 일을 하셨다면, 그분은 분명 낙심한 제자들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필요들을 공급 하시는 더 작은 일들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최고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시는 아버지시며, 지금도 날마다 자기 자녀들을 돌보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시는 아버지시다.


2. 우리를 멸망하기를 원치 않는 사랑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은 반드시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 마땅히 심판 받아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일한 해결책이 그의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 시키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희생시키고라도 나에게 유익한 일은 서슴없이 한다. 남도 유익이 되고 나도 유익이 되는 소위 윈 윈 정책을 좋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장 큰 피해, 목숨이 희생당하고 남을 복되게 하는 일에 서슴없이 참여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무가치한 우리의 구원만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바울은 그의 사랑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3. 십자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합작품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합작품이다.

이사야서 53:7절 말씀을 읽어 보자.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5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글의 저자는 그 희생자가 죽으러 가면서도 반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 부당하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가 ....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구약에는 항상 고난 받는 자가 자기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 이론을 제기하며 도전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왜 이종은 고난을 받을 때 특이하게도 침묵을 지켰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대답은 그 종이, 이미 결정된 대로 그 비극이 일어나도록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편에서의 의식적인 선택,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그의 결단에 의해 “그에게 일어나게 한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드려졌던 이스라엘의 모든 짐승 제사와 구별 된다. 제물로 선택된 짐승들은 그 문제에 관해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짐승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체 그저 새로운 초장으로 가거나 털을 깎으러 가는 것처럼 죽으러 갔다. 그들이 잠잠했다면 절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온갖 기능을 온전히 소유한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박해하여 죽이도록 허용했다.  


 이것은 이삭이 이미 보여 주었던 그의 온유함을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올라 갈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불과 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천연덕스럽게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 하실 것이라고 대답 했다. 아마 이 대답을 듣고 이삭이 이렇게 다시 물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버지!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번제로 준비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이삭은 이렇게 대답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해야지요 뭐”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대화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 나는 원하는데 남편이 원치 않는다,  혹은 아내가 원치 않는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다. 교회에서도 목사는 원하나 장로들이 원치 않는 경우가 있고, 장로들은 원하나 목사들이 원치 않는 경우가 있다. 누가 더 하나님의 듯을 이루고자 하는가를 따르는 것이 좋은 일이다.


Ⅱ.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준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예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이다.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유월절 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장자를 구속 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피를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 피가 430년 동안의 애굽의 노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그들 모두를 보호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장자의 생명을 구했다. 피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생명은 애급의 장자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께 드려 졌을  것이다. 모든 장자는 적절한 값을 치르고 하나님에 대한 책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유월 절 희생의 일차적 목적 중 하나였으며 그 희생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12,13).


  그들이 생명을 구하려면 대신 다른 생명이 빼앗겨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대신 어린양을 바치고 그들의 피 대신 그 양의 피를 흘리도록 하셨다. 히브리 기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사야 53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아주 생생하게 예언해 주었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노래에서는 종이 받는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었다. 10절에서는 그 주제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강한,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용어로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그처럼 불의하고 소름끼치는 행동을 도모하시는가?  “맞으며 고난을 당하면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제사 경험에서, 그리고 특별히 그들의 속죄일 관행에서 직접 유래된 말이다.  이 속죄 염소는 정확하게 무엇을 제거하는가? 종이 지고 가는 짐은 고통과 질병이다. “징벌을 받다”라는 단어. 이 특정한 단어들을 선택한 것은 여기에서 인간의 온갖 문제를 다 다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종이 받은 고난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의적인 반역뿐 아니라, 육체적, 도덕적, 영적으로 우리를 황폐하게 하는 모든 것과 관계있다.


 이 구절들에서 “그”와 “우리” 간의 상호 작용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잘 알려져 있던 대속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대속은 새로운 것 아니다. “하지만 새롭고 혁명적인 점은 이 경우 고난을 받아 대속 자가 되고 구속할 권세를 받은 사람이 상당히 평범하고, 힘이 없으며, 하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죄와 질병을 처리하고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이 나온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악의 짐과 죄책을 고난 받는 종에게 지우신다. 그 종은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당하셨으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신”(5)분이다.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는” 속죄일의 속죄 염소처럼, 멸시받고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고 매 맞고 찔리고 상한 종이 그 모든 것을 지고 가신다.


  종의 역할은 대속자로 고난을 받는 것이며, 그래서 죄를 가져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상하되, 짓밟혀 죽게 된 사람처럼 상했다. 그의 삶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부상을 입었으며, 찢어진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부름 받은 역할에는 즐거운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꺼이, 아무런 불평 없이 그 역할을 맡았다(7). 


 “우리는 다....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이 고난 받는 종의 죽음은 우리가 돌이켜 방향을 바꾸고 죄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죄 된 상태는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소원함이 극복되며. 깨어진 인격이 나음을 입는다.


 우리 가운데 죄로 말미암아 인생을 망치는 개인 가정, 교회, 회사, 국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온갖 죄가 사해 진다는 소식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는가?


Ⅲ. 십자가는 승리의 선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귀로부터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 한다. 마귀는 죄와 죽음으로 그의 권세를 들어냈지만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죄와 죽음을 담당하심으로 더 이 이상 마귀가 사용할 무기가 없다. 그동안 죄와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권세를 부렸던 마귀는 더 이상 그 무기를 사용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서 요한 사도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의 생활을 하며 왕 노릇 할 것이라고 기록 했다.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가이사와 그의 심복들이 아니라 그들이 통제권을 쥐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스리며 그들이 그분과 함께 다스릴 날을 소망 가운데 이 사실을 고대한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들은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9). 죽어가는 어린양이 그의 십자가에서 모든 악한 권세들과 대결하셨으며 요한 계시록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철저히 그들을 패배시켰다. 그들은 쇠퇴하는 그들의 권능을 잠시 동안 간직할 수는 있지만, 최종 결과는 논의의 여지도 없다.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다음 장에서 마귀는 추방되고 그의 모든 수행원들과 소행들도 추방될 것이다. 비천한 약함을 지심으로 부패한 권세를 쳐부수려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은 성과를 거두었다. 부활이 그 증거다.


그래서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합당하다(계 5:12).

그 단어들은 주의 깊게 선택된 것으로, 매우 체제 전복적이고 또한 매우 깊은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들은 로마황제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속성들을 예수님이 가지신 것으로 돌리기 때문에 체제 전복적이다. 그리고 그분은 힘으로가 아니라 자기  희생으로 그것을 얻으셨다.


능력. 십자가는 패배에 대해 말한다. 세상의 권세들은 그리스도를 쳐부수고 그분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실제로는 그분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부. 십자가는 빈곤의 궁극적 표현이다. 자기 소유의 집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으며 재산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 궁극에 가서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옷가지까지 다 빼앗기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달렸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빈곤함은 우리의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지혜. 십자가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어느 누구도 제 정신으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을 처분하기 위한 방편으로 십자가를 고안해 냈지만 사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기 때문이다(고전 1:24,25). 이런 방법으로 마귀를 파멸하고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힘. 십자가는 연약함의 전형이다. 세상의 권세들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완전한 무력함과 무방비 상태를 경험하도록 한다. 그분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후 13:4).”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존귀. 십자가는 그분의 보좌이며 또한 그분이 무덤에서 부활로 가는, 땅에서 승천하는. 그리고 하늘로 높이우심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이제 그분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계시사 언젠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빌 2:9-11)하실 것이다.


영광. 갈보리는 어두움의 장소였다. 갈보리에서 어떤 영광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두움을 헤치고 억누를 수 없는 영광의 희미한 불빛이 비추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증거 했다. 그는 또 그분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때는 그의 기적들이나 도저히 반발할 수 없는 가르침에서가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때라고 증거 했다.

찬송. 십자가는 저주를 나타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도록”(갈 3:14)했다. 그래서 이제 그분은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 되셨다. 윌리암 바클레이가 말했듯이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그분께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선물”이다.

“세세토록”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Ⅳ. 십자가는 새로운 인류를 창시 했다.


계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분은 들려 짐을 받음으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의 많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끌어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백성을 만들며 만물을 재창조 하는 일을 하셨다. 


 십자가는 개인을 구원 해 줄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특히 제자들을 태하셔서 훈련시킨 것에서 예수님이 죽은 후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고 그분의 메시지를 전파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설립 하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제사장,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백성이 그분을 통해 생겨나고 있다.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막 15:21), 로마 백부장(막 15:39), 예수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버렸을 때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랐던 여인들(막 15:40,41)은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예수님과 한편임을 밝히면 많은 희생이 요구 되었으며 심지어 위험까지 했을 그 때 여인들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따랐다. 십자가는 성별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주었다(막 15:38). 옛 유대교의 “비밀 통로”는 닫혔다. 새 시대에는 단 하나의 출입구만이 있는데 십자가를 통한 길이다. 그리고 남자들과 여자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자가 모두 평등 가운데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를 누리고 새로운 인류를 형성 하면서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어간다.


고린도 전서 1:26-2:5에서 보면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 하신 사실을 기록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개인들을 구원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 새 시대의 공동체를 창조 하신다. 그 공동체는 십자가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여전히 십자가의 본을 따라 산다.


 회당장 그리스보, 아마도 비교적 부유 했을 가이오(14). 선교 사역을 후원 할 수 있었던 스데바나(고전 16:26)성의 재무 에라스도등이 십자가로 인하여 생긴 공동체의 일원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혜롭지도 영향력 있지도 않았다(고전 1:26).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하천한 사람들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하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분이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에 전적으로 들어맞는다. 십자가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 되었다면 무력한 사람들과 세상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이 거기 끌렸다는 것은 적절하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은 참 얼마나 어리석은 분이신가! 고린도 교회 구성원은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 했다. 십자가의 도는 개인의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사회 변혁으로도 이어 간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는 인종적 원수 관계를 해소한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 인사이의 장벽을 헐어 버렸다(엡 2:16).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배제 되었던 사람들이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엡 2:19). 외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권속이다(19).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까워 졌다(13). 그리고 지속적으로 충돌하던 두 민족이 이제 평화로운 새 인류 안에서 연합한다(12-15).


십자가 안에서 온 인류를 화해케 하신 하나님은 이제 십자가 안에서 온 우주를 화해케 하신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기서 말하는 만물은 전 우주를 말한다. 그 용어는 온 세상이 하나님과 심각하게 두절된 상태였으며, 이제 이 모든 측면과 모든 차원에서 그분과 소외된 상태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모든 것을 변화 시켰으며 우주가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다시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질서 정연한 상태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Ⅴ. 십자가는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다(갈2:20,5:24, 6:14,빌3:10-11).


우리는 일생 동안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살아야 한다. 내가 어느 정도 헌신 했으니 이제는 좀 쉬자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이 가장 축복된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축복된 삶이란 바울처럼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고난에 참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회피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적인 축복은 중단되고 만다. 우리의  목표는 항상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바울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십자가의 고난이 삶을 살았다.


 옛날의 한 성도가 십자가의 고난의 삶을 가르쳤더니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은 아무개 집사님과 같이 주님을 섬길 것을 요구한다면 이 교회에 계속 다닐 수 없어요. 그러더니 얼마 안가서 교회를 옮겼다. 그래서 얼마나 큰 낙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집사님 같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 한 것이고 아니 그보다 더 바울 같이 섬기도록 예수님처럼 섬기라고 가르치고 싶다. 그 집사님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십자가 없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너희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핍박을 받느냐 물었다. 아이들 대답이 걸작이었다. 왜 예수님 믿으면 핍박이 있어요. 불교 믿는 사람이 핍박을 받아요.  십자가를 가르치는 교회가 성장한다. 학생 운동의 역사를 보면 십자가를 가르치는 단체가 한국 학생 운동을 주도 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역사적인 십자가 처형에서 유익을  얻도록 부름 받을 뿐 아니라 날마다 그분과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부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의 운명은 십자가 모양의 생활 방식을 영위하는 것이다.


 최근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은 이러한 성경 진리를 무시하고 대신 영광의 신학과 성령의 변화시키는 권능만을 강조하는 풍조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전 세대들이 때로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관점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가르치지 않은 채 부활의 삶,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삶, 혹은 영적으로 훈련된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케직 사경희의 초기 강사였던 휴 에반 홉킨스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실제적인 거룩함 사이의 중대한 관련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진정한 진보의 조건은 그 죽음을 따르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열망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꺼이 죄에 대해 죽으려는 것이 영혼의 진보를 나타내는 더 참된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과거의 사건일 뿐 아니라 현재의 경험이 되지 않는다면 거룩해질 수 없다.


 예일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최근에 바울의 처음 다섯 서신 서에 나타난 사상의 개략과 관심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논문 제목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이라고 붙였다. “바울의 가장 특징적인 신학적 강조점 중 하나는 교회의 역할이 십자가의 특색을 가진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이 시기에 교회는 십자가 형태의 생활 방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계속 헤이스의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리처드 테네힐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바울의 가르침은 두 가지 기본 단위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결정적인 과거의 사건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현재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명령처럼 명령법으로 말한다고 보는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십자가 안에서 연합된 삶(갈 2:20).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그분과 동일화 되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완료 시제로 쓰고 있는 것을 유의하라. 그것은 믿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신자의 영단번의 헌신 행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사는 것과  분리 할 수도 없다. 전자는 후자로 이어진다. 전자는 후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신비주의나 완벽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일어나는 변혁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할 때 성령님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 하사 안으로부터 우리를 변혁시키신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란 내가 밖에서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며 이전에 그분을 믿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표와 소망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정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유익들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율법을 만족시키려 애쓰기보다는 구속받은 자의 충만한 자유를 누리리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적이고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리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과 조화를 이루어 행하며 그분이 마음껏 우리의 성품을 바꾸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을 발휘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그리고 또한 동일하게 그분과 함께 사는 것 그리고 그분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바울의 말은 먼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화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율법과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의롭게 될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2.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갈5:24)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신자들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과 자아에 대해 죽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죄를  죽이라고 권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죄 된 성품과 세상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권세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에서 그 견고한 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는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먼저 십자가에 달리면 죽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보통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결정적이고 철회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로 십자가에 달리면 교수형이나 총살형의 경우처럼 즉각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게 된다. 19-21절은 죄 된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포괄적인 죄 목록이 나와 있다.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와 대조적으로 성령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가 자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22-23).  이런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다고 해서 신자들이 팔짱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성령이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그런 열매를 맺으시도록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열매가 자랄 수 있도록 성령님께 기꺼이 협조해야 한다. 그분의 역할은 생명을 낳는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특별히 가지치기를 하여 옛 삶을 잘라내고 수확의 결실을 맺는 데 꼭 필요한 헌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죄 된 열정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가? 그것은 생생하고 냉엄한 이미지로서 죄 된 본성을 단호히 끊어 버리도록 명한다.


 티모시 조지가 설명하듯이 “바울은 여기에서 고행의 과정, 기도와 금식과 회개와 절제 훈련을 통해 날마다 육체를 죽이는 금욕의 과정을 묘사한다.” 그는  이것이 “일관되고 충실하게 경계하며 세상과 관계를 끊고 육신의 금욕”을 하는 것 외에는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 완전함으로 이끄는 즉 효 약은 없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제대로 상기시킨다. 왜 영적 훈련에 대한 안내서들 중에는  금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거의 없는가? 우리 대부분은 훨씬 더 쉬운 길을 택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순식간에  거룩하게 만드시거나 아니면 죄 된 소욕을 일으키는 칩을 빼버리고 경건한 소욕이라는 칩을 대신 끼워서 우리가 즉시 거룩하게 되도록 다시 프로그램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죄의 습관을 점진적으로 절멸시키고 우리의 욕구가 하나님께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죄가 우리 삶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을 예방하려면 꾸준한 헌신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죄의 권능은 십자가에 의해 깨어졌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날마다 죄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패커죤 오웬의 글을 인용하여 십자가의 삶을 소개 한다.

“그대의 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역사하도록 하라. 그의 피는 죄로 병든 영혼에 위대한 주권적 치료책이다. 이 안에서 살라. 그리하면 그대는 정복자가 될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통해 그대는  그대의 욕망이 그대 발아래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반복할 뿐이다. 제자라면 누구에게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인 우리가 “우리의 믿을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에 고정시켜 죽여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죄 된 옛 방식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거룩함의 정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갖는 것과 덜 값어치 있는 것들에 대한 다른 모든 열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토저는 이렇게 경고했다. “천박한 현대 교회 지도자들은 성소 안에서조차 재미를 찾으려는 오락에 미친 성도들을 즐겁게 하려고 십자가를 수정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같이 복음을 수정하는 것은 영적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다. 침묵은 세상의 분위기가 교회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가 주님의 의견보다 세상의 의견을 얼마나 더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준다.


3.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삶(빌3:10-11).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말할 때, 그것이 세 번째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 주제를 서너 번 다시 언급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견디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빌립보서만큼 그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없다. 복음을 위해 자신이 받은 고난에 대해 말한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진행 중인 이야기의 일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쓸 때 그 기초는 잘 놓여져 있는 셈이다.


  바울은 우리가 세 가지, 곧 그리스도부활의 권능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곧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큰 바람은 그가 이미 아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 충만히 아는 것 “토론할 신학적 주제로서가 아니라… 함께 사귀어야 할 인격적 존재로서 아는 것이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은 둘 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바울은 고난 받고 죽기를 원하는 것은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부활이 없다면 고난은 무의미하고 궁극적으로 실패와 무익함으로 끝나는 끝없는 투쟁이 될 것이다. 바울은 고난이 격렬하고도 실재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상처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하찮은 것인 양 가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대해 냉정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지배하는 더 큰 실재가 있다. 그것은 부활의 실재이다. 부활에 비추어 볼 때 고난에 대해 할 말이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다. 먼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없었다면 부활은 없었을 것이다. 죽음이 생명보다 먼저 일어나며 부활의 삶은 당연히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고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나 겪는 전형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만 고난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위해 애쓴 결과 고난이 올 때 결코 놀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우리 삶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기대하는가?


 하지만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고난을 예상해야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한다. “모든 것의 실마리”이다. 우리의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랬듯이 구속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은 “그분의 고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 후회의 원천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언제나 기쁨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분의 몫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수치를 지고 갈보리로 행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엄청난 특권을 누린다. 고린도후서 4장에 대한 리처드 보캄의 해설은 이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다는 생각을 삶에서 겪은 극적인 핍박들이나 엄청난 기적들에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역이 요구하는 것들에 직면해서 겪은 일상적인  약함이나 종종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하는 그가 얻은 승리에도 적용시킨다는 것을 지적한다. ‘죽는 것과 다시 사는 것’ 은 바울이 그의 사역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그가 사역에서 겪은 모든 오르내림은 바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 곧 그 안에서 그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일화될 수 있는 체험이었다. 보캄은  이어서 이렇게 쓴다. 바울의 절반만큼만 기독교 사역에 헌신한다면 누구나 바울이 말하는 약함이 무엇인지 경험할 것이다.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과로하여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때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하여 의기소침해졌을 때 목회에 심혈을 쏟느라 정서적으로 고갈되었을 때 - 간단히 말해 기독교 사역자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때에 그는 자기로서는 힘에 부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런 일에 대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가운데 사는 것이긴 하지만 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동일화하고 영원히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게 될 그런 삶이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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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절 말씀집회 1. 예수님의 십자가
  • 2007-04-08
  • 안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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